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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 님의 고백인즉,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사람들은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다.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른가?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태권도에는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 대해 이종우 님은 동의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저서에 의하면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1946년부터 고심하기 시작한 모양.[2] 1950년대 군생활했던 군번들이 회상하는, 군대에서 천지형, 원효형 품새하던 시절이 이때이다. 천지형, 원효형은 지금 ITF의 천지틀, 원효틀이 된다.[3] 오도관은 민간의 청도관과는 관계없는 당시 군 장성 최홍희가 군대내 세운 도장이지만, 남태희를 비롯한 청도관 출신 부하들이 많아 청도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최홍희는 청도관 2대 관장 손덕성 명의로 명예 4단증도 받는다.[4] 당장 미국 태권도의 개척자 이준구만 해도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쭉 활동했다.[5] 대표적으로 타이거 JK무한도전에서 자신의 태권도를 '지도관(智導館) 태권도'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멕시코에 진출한 문대원 관장은 '무덕관 태권도'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멕시코 내에선 무덕관의 지명이 상당한 편.[6] 노병직은 자신이 이원국에 앞서 1944년 3월 개성에서 송무관을 개관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동아일보 기사 등에 따르면 1946~7년에 정식으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일이고 기록이 미비하여 현재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 1944년에 수련한 양반 없는가[7] 청도관의 물결 도(濤) 자도 송도관의 도 자에서 따왔다.[8] 다만 노병직은 이원국이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만 송도관에 늦게 입관했다며 후배라고 주장했다. 보면 둘은 애증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9] 일반적으로 이원국의 청도관을 최초의 도장으로 보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황기의 무덕관을 최초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원국이 이렇듯 잠시 폐관했다 해방 후 다시 재개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0] 이원국 본인은 당시 5천여명에 달하는 청도관 제자들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라는 이승만 지시를 거절해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를 받고 고문을 당하다 지인이던 육군 중장이 보증서를 내 겨우 풀려나 이후 피난민 틈에 끼어 부산에 가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고, 노병직은 이원국이 서울이 점령당했던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청도관원들과 한동안 부역한 사실이 서울 재점령 후 들통이 나 고된 문초를 받던 중 당시 이기권 선생의 도움으로 1.4 후퇴 직전에 간신히 풀려나 일본으로 도피했다고 주장했다. 둘 다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큰 맥락은 한국전쟁 당시 이원국을 비롯한 청도관원들이 남북 양쪽에서 고초를 겪다 지인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피한 셈이 된다.[11]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치열해짐에 따라 일제의 법은 한국인 5인 이상이 집합을 하게 되면 반드시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되는 삼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 가라테를 가르치겠다고 하자 관할 경찰 당국은 반색하며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12]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교습 시간은 매일 아침 6시부터 2시간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식 도장이라고 보긴 좀 애매하긴 하다.[13] 이원국은 이때 개관 축하차 개성에 찾아왔고 축하 의미로 송무관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줬다고 주장했으나, 노병직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반대로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청도관 재건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는데, 청도관 3대 관장을 지낸 엄운규는 사실과 다르다며 노병직의 주장을 일축했다.[14] 화수도부라고도 했다.[15] 정황상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보인다.[16] 이 당시의 우슈는 산타가 없었고 (산타는 태권도보다 20년 정도 늦게 만들어졌다.) 당시엔 표연밖에 없었으며 명칭도 십팔기(모 무예도보통지 복원단체랑 이름만 같은 다른 무술이다.)인 등 지금과는 꽤 다른 형태의 무술이었다.[17]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권법은 "중국 송태조 32세 장권"의 1개 투로(품새)이다. 맨손무술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체계나 수련법이 나와 있지 않다. 애초에 무예도보통지는 권법을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인용하여 무기술을 익히기 전 몸풀기와 힘쓰기를 익히는 정도의 용도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권법을 익혀서 맨손으로 적을 때려 잡는 용도가 아니라 냉병기술을 익히기 전 워밍업 정도로 익혔다는 이야기.[18] 본인 주장이 아니고 실제로 현재까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황기는 가라테를 배운 적이 없으며 그의 행적상 배울 여건도 없었다.[19] 한국 전통무술인 수박과는 완전히 별개의 무술이다.[20] 물론 황기와 송도수박의 접점은 전혀 없겠지만 황기 본인이 수박을 계승했다 주장하는 게 마냥 뻥카만은 아니란 얘기.[21] 택견의 계승을 주장하는 대다수의 태권도 사범들은 이런 최소한의 성의조차 없었단 걸 생각하자.[22] 일례로 YMCA권법부의 후신 강덕원의 홍정표는 황기와 최홍희의 창헌류에 대해 평이 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술의 오의는 직접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전승 관계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출처: [원로들의 이야기] 故 홍정표 원로의 태권도와 무도 - 하편.[23] 사실 이건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이기도 하다. 당장 민복 저고리만 봐도 앞섶 깃이 중앙에서 떨어지는 형태이다.[24] 사실 이건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한복에서 내려오는 전통이다. 지금도 민복 저고리를 보면 앞섶 깃은 중앙에서 떨어지지만 뒷섶 깃은 왼쪽 옆구리(고구려 복식에서 좌우만 바뀜.)까지 닿을 정도로 섶이 깊이 겹치는 구조이다.[25] 물론 초창기 태권도 역사에서 황기를 언급하지 않고 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당시 무덕관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보면 황기는 최홍희와 함께 격동의 태권도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아픈 손가락인 셈.[26] 참고로 미국 내에서 태권도가 당수도를 추월한 지금도 태권도 도장들은 McDojo로 대표되는 키즈부가 절대다수이지만 당수도 도장들은 가라테 전통유파들처럼 성인들이 수련하는 경우가 많다.[27] 물론 태권도가 창시된 이후 떨어져 나온 단체라서 내려차기, 뒤돌려차기 같은 태권도 고유의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테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28] 세계 가라테 미들급 챔피언.[29] 멕시코 태권도 인프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수련생만 300만명에 달하며 UFC에서 활약하는 태권도 베이스 파이터들의 상당수가 멕시코계일 정도이다.[30] 이란은 한국과 함께 손꼽히는 명실상부한 태권도 세계 최강국이다. 심지어 2011년 경주 세계 태권도선수권 대회 땐 한국을 제치고 종합우승까지 거머쥔 적도 있을 정도.[31] 세계적으로도 꽤 높은 인지도를 가진 태권도 강사로, 인간 병기 태권도편에선 내려차기를 가르치는 역할로 나오기도 했다. 나이 들어선 산신령처럼 백발에 수염 기르고 도포 입고 다닌다.[32]대한태권도협회 회장. 물론 정통 무술인하곤 멀어보이지만 넘어가자.[33] 여긴 단일 도장이라 보기 애매하니 제외.[34] 후술된 창무관과 강덕원의 역사는 서성원의 『태권도뎐』(애니빅, 2014)과 박철희 사범의 구술을 중심으로 정리한다.[35] 본인은 '주안파'라고 칭했는데, 이는 권법의 중국 발음인 취안파(quánfǎ)를 말하는 것이다.[36] 재미있게도 남권과 가라테는 손기술 위주이고, 북파권법과 태권도는 발기술 위주라는 공통점이 있다.[37] 둘을 사제 관계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윤병인은 토야마에게 중국권법을 가르쳐주고 토야마는 윤병인에게 가라테를 가르쳐주는 교류 관계였다는 시각도 있다.[38] 사실 토야마는 개인적으로 후나고시 기친을 이토스의 정통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39]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6.25 전날 보인 시범의 기법들만이 면면히 전해질 뿐이다.[40] 다만 한국전쟁 도중 윤병인이 월북했기에, 이후 박철희 사범처럼 이런 특이한 모습을 보인 제자들이 스승과 암호로 연락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정보부의 감시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북에서 윤병인이 가르친 격술사범들은 이후 1980년대 북에 보급된 ITF 태권도에 편입되었다는 시각도 있다.[41] 다시 말하지만 다수의 기간도장 사범들은 당시 자신들이 배운 가라테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42] WT의 품새를 창시한 이종우가 고려 품새를 만들 때 택견 기술인 칼재비를 차용했다고 한다.# 이종우는 지도관 출신이지만 5대관 중 송덕기와 연줄이 있던 건 YMCA권법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려에 칼재비가 존재하는 건 YMCA권법부의 영향력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43] 준비 자세가 팔극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44] 흔히 중국무술이 실전 된 것이 문화대혁명 탓으로 주장되는데, 문화 대혁명은 10년도 안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 무술이 실전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태권도처럼 여러 계파의 무술이 표준화되면서 우슈로 정립되면서 통합되었다고 보는게 더 맞다.[45] 허인욱(2008), 『(관(館)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형성사』, 한국학술정보, 99쪽[46] 서성원, 김병수 원로가 故최홍희 총재 묘 앞에 양주 놓고 절한 까닭은?, 태권박스미디어 2022. 2. 1.자 #[47] 허인욱(2008), 『(관(館)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형성사』, 한국학술정보, 101쪽.[48] 당시 관장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49] 한동IN 뉴스레터 지승원 교수편.#[50] 이건 스포츠 문화가 있던 택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다른 무술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만.[51] 다만 이종우는 이때 대한태수도협회를 고집해서 최홍희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실제 이종우는 본인이 배운 가라테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인물이었고, 훗날 태권도가 가라테가 기반이 된 무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52] 다만 안티들에겐 품새가 가라테 가타 그대로 베겨쓴 수준이라고 욕도 먹는다.(...)[53] 무덕관 황기 관장이 당수도에서 개칭한 첫 무술명으로 화랑의 화를 따와서 화수도. 참고로 태권도 관련 최초의 서적인 '화수도교본'(조선문화교육출판사)이 1950년 나왔다.[54] 최홍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본인이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라 주장했지만, 오늘날엔 최홍희와 그의 부관 남태희가 함께 옥편 뒤지다 태껸과 비슷한 태권을 조합해 태권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태껸은 1954년 최홍희의 부대를 시찰한 이승만이 변형 가라테 시범을 보고 태껸(택껸)으로 착각해 언급한 것이 영감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1953년 제29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태권도부대를 창설하고 경례구호도 태권으로 했다는 말도 있어서 조금 전후관계가 미묘하다.[55] 사실 밀어붙였다기도 뭐한게, 최홍희는 태권도란 명칭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 반대파와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노병직, 윤쾌병, 이남석 등 민간도장 관장들의 반발로 무산될까 평소에도 걱정했다고 한다. 민족주의자였던 최홍희는 가라테 냄새가 나는 공수도 비슷한 류의 단어를 내켜하지 않았고, 반대로 자기들 무술에 자부심이 있던 상당수 민간 도장들은 기본이 가라테인데 이름만 태권으로 바꾸는게 도리어 꼼수다, 오/청도관이 쓰는 태권도 쓰기 싫다, 군 인사 최홍희가 왜 민간단체인 자기들 무술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발하는 편이었다.[56] WT는 이곳을 대한태권도협회의 시초로 본다.[57] 60년대 중반에 나온 국내 중견 출판사의 생활대백과사전에는 태권도가 아닌 수박도로 나오고 있다. 물론 그 전반적 내용은 당시 국내 책들이 거의 그랬듯 일본 서적의 중역판이고 가라테 항목 대신에 넣은 것이었지만 그 때까지도 태권도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58] 팔극권이라는 설이 유력하다.[59] 여담으로 역사에 If란 없다지만 만약 이때 관들이 각자 따로 가서 본인들의 독창적인 무술로 진화했다면, 태권도의 전체적인 파이는 줄었을지 몰라도 다른 근대무술들처럼 신종한국무술 도장들이 지금쯤 국내에 제법 있었을지도 모른다.[60] 이후 황기는 제자들에 의해 자기가 세운 무덕관에서 제명당한다.(...)[61] 의견 차이를 넘어 이미 감정적으로도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62] 품새로는 아마 최초. 이전에도 태권도교본은 있었다.[63] 해방 후 좌익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박정희는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당시 군 재판관이 최홍희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악연이라 할 수 있다.[64] 다만 반론측에선 최홍희가 북한과 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왜곡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65] 이전에는 코리안 가라테로 간판 걸고 도장을 운영하는 사범들도 많았다.[66] 사실 최홍희는 김대중 정부 기간 고국에 묻히고 싶다며 남한 귀국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으나, 끝내 성사되진 못했다.[67] 다만 전통 가라테에도 슨도메 방식의 겨루기가 있긴 하다.[68] 이소룡 창시자가 당시 교류하던 이준구 사범한테 태권도 발차기를 몇개 배워간 적이 있다.[69] 기존 문서에서 'WT 계열 단체'라고 명명하여 국기원을 세계태권도연맹(WT)계열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내 태권도 4단체(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진흥재단)의 역할과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WT는 경기단체로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종목단체일 뿐, 국내 태권도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곳이 아니다. 국기원이 과거 태권도 9개관의 통합도장이자 산하에 태권도연구소를 두고 관련 학술지인 국기원태권도를 편찬하는 만큼 국기원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이 타당하다.[70] 출처 - 국기원 '태권도 역사' 페이지.[71] 출처 - 국기원 '태권도 역사' 페이지.[72] 출처 -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역사' 페이지.[73] 다만 택견은 자기들이 수박을 이어받았다는 입장이다. 재물보 항목 참조.[74] 정확하겐 2가지 방식이 있었다. 이런 넘어지거나 손이 땅에 닿으면 지는 식의 시합식 (서기) 택견과 격투식 (결련) 택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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