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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Do K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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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5대관 중 최초로 설립된 도장으로 알려진 곳이다.[6] 태권도의 형성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도장이다.



이원국은 19세인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원국은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에 다니면서 1929년부터 10년간 일본 가라테의 본산 쇼토칸(松濤館, 송도관)에서 근대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1957)에게 가라테를 배웠다.[7] 1936년에는 훗날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도 쇼토칸에 들어와 이원국과 함께 수련했다.[8]



1944년 9월 이원국(1907~2003)이 서대문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개관했다. 개관 당시 이름은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이었다.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라'라는 뜻에서 청도관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원국은 이후 자신의 명함한국태권도 창시주, 총재 이원국이라고 새기고 다니기도 했다. 이원국은 일단 개관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가면서 일본 제국 상황이 어려워지자 일단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예배당인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다시 재개관했다.[9] 이후 자신의 고향인 안국동으로 도장을 옮겼다.



이원국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갔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말이 나온다.[10] 하여튼 일본에 체류하면서도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과 교류하던 이원국은 제자들의 성화에 종종 방한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이후부턴 사실상 국내 태권도계와 연이 끊어지게 된다. 1960년대 후반 태권도교범(진수당)을 출간하기도 했다.



청도관은 9대관 중 무덕관에 이어 가장 많은 수련자를 배출했으며, 한국 태권도계 원로급들을 다수 배출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발차기 위주의 수련과 태권도란 명칭을 선제적으로 쓴 민간도장이기도 하다. 청도관에서 정도관(正道館), 오도관(吾道館) 그리고 국무관(國武館), 청룡관(靑龍館) 등이 분리되었다.



이원국은 쇼토칸 후나코시 기고의 직계 제자였는데 이원국 유학 당시 쇼토칸은 후나코시 기고와 그 제자들에 의해 다른 유파와는 달리 발차기 기술들의 도입 개발과 실전 도입을 활발하게 하던 유파였다. 카타상으로만 쓰이던 발기술들을 실전 도입 하기면서 하이킥 수련을 하였었다.


쇼토칸에서 대략 개발되거나 실전 활성화 된 기술들만 해도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뒤차기, 앞후리기(낚아차기), 날아차기, 두발당성, 아시바라이 등이 있으며 이 발차기들을 배워 한국으로 온 이원국이 청도관에서 발차기 위주의 수련을 하다 발차기 수련이 없던(시토류, 고주류, 슈도칸) 다른 유파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며 다른 유파들도 발차기 수련이 활성화 됐다 한다. 일례로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는 조선 연무관에서 초기 수련시 발차기 수련 자체가 없었다고 증언했었다.



이원국은 어렸을 적에 택견을 배웠고 그것을 가라테에 접목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원국은 택견 수련 경력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기에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옛날에 택견이 지금처럼 무슨 가르치는 학원 같은 게 있어 등록하고 다니다가 나중에 명부를 살펴보면 수강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은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예컨대 옛날 사람들이 어렸을 적 씨름 배웠다고 무슨 증명서같은걸 받는 시절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원국은 후술하는 황기와 같이 특별히 전통 무술의 복원을 추구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택견 수련 경험을 허위로 말하고 다닌다고 해서 딱히 실익이 있지도 않았다.



진짜 문제는 "접목시켰다"는 말이 무색하게, 태권도에 택견 기술이 유입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타 내용은 아래의 'WT의 역사왜곡' 문단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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